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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세컨
당신은 나에게 눈을 달라 했다 나는 눈을 주었다 겨울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입을 달라 했다 나는 입을 주었다 당신은 나에게 손을 달라 했다 나는 손을 주었다 겨울이었다 북풍이 씩씩한 주먹으로 구름을 잔뜩 뭉쳤고 눈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발로 걸어갔다 눈이 없어지자 눈물이 안으로 흘러 고였다 입이 없어졌기 때문에 울음이 안으로 잠겼다 나는 아름다운이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겨울을 생각했다 심장은 뚝딱뚝딱 손이 없어진 내가 어떻게 겨울을 열까 눈도 보이지 않는 내가 어떻게 겨울을 볼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은 토닥토닥 세상을 덮고 까만 밤의 지붕들을 덮고 당신의 발등을 덮고 어둠 속에서 혼자 녹았다가 밤새도록 꽝꽝 얼었다 밤새 아주아주 커다란 거울을 만들어주었다 나..
우리는 그냥 그렇게 서서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나는 너의 말을 모르고 너도 나의 말을 모르는데 너도 꼬리를 내리고 나는 물끄러미 우리 둘 사이에는 흐르는 밤이 하나 침묵이 둘 / 불한당들의 모험 35-아름다운 턱시도 고양이들은 짧은 여름밤을 우아하게 말아올린다, 곽은영
달콤해 달콤해 말랑말랑한 공기가 동그란 꿈의 과자를 한 알씩 입 안에 넣어주었잖니 한 알씩 입에 넣으면 마시멜로처럼 녹으면서 꿈의 색깔을 번지게 하지 그렇게 혀 밑에 넣고 굴리면서 지치지도 않고 거리를 걷고 걷고 걸었잖니 밤의 눈가에 하얀 눈곱이 앉을 때쯤 미안해진 내가 먼저 작별할 만큼 달콤해 달콤해 별자리가 바뀌고 새들도 돌아오고 잎사귀도 다시 피었는데 오늘 나는 아직도 겨울을 걷는 중이야 골목을 다 뒤져도 라일락 그늘 아래서 코를 잡고 킁킁거려도 내가 알던 봄밤은 오지 않았어 바람이 불고 꽃이 지고 조무래기들이 활짝 웃으며 사탕을 한 아름 건네도 어딘지 허전해 물리지 않게 딱 한 알씩만 입안에 쏙 넣어주던 친절하고 상냥한 봄밤은 어디 갔을까 / 불한당들의 모험 31-봄밤은 달콤해, 곽은영
열렸다 우리들의 나라가 일 년을 기다려온 우리들의 나라가 풍선을 타고 왔다 빗자루를 타고 왔다 고래를 타고 왔다 버스를 타고 왔다 비행기를 타고 왔다 걸어왔다 달이 아주 작고 하얗게 떴다 반가워요 어서 와요 당신의 미소는 여전하네요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이 행복한 포옹을 나누고 죽은 자들이 돌아와 광장을 두근두근 울리는 시간 아침부터 알록달록한 모자를 쓰고 예쁜 꽃을 들고 노란 등을 달고 주먹밥을 나르고 솜사탕을 나르고 이야기 방망이 선물하고 해골빵을 선물하고 쭈글쭈글 세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울리며 만세를 부르고 아침부터 죽지 않은 자와 죽은 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줄다리기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낮잠을 자고 열려진 시간이 똑딱똑딱 굴러가고 살며시 서로를 쓰다듬는 말이 ..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는 땅 귀를 씻고 이곳에 왔어요 구두를 벗고 맨발로 왔어요 낯선 언어들이 음악처럼 들리는 곳 당신들은 왜 나를 잡으려고 했을까요 이해하고 싶어라는 징그러운 거짓말의 덩굴 가위로 덩굴을 자르는 대신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빠져나왔죠 당신들의 입맛대로 내 이름은 노랗다가 파랗다가 한 번도 진짜 이름은 알려준 적이 없는데도 거울 속 나는 그때그때 달라서 말하기 곤란했을 뿐인데 우리들은 모두 번쩍번쩍한 태양을 머리통에 박고 살지요 죽은 엄마는 달의 감정을 내 가슴에 달아주고 떠났어요 여느 엄마처럼 나는 달의 눈물을 말하고 싶었으나 태양의 빛이 너무 강렬하기에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는 이곳 빗소리가 아름다워요 푸른 앵무새는 고맙게도 매일 축축한 흙냄새를 물어와요 나의 달은 매일 울어요 비밀은..